사 46:1-13 (6/21/2024)
우상에게 이름까지 붙였단 말인가? 벨? 느보? 왜 신이라는 것들이 엎어지고 구부정한 완전 패배자의 모습인가? 그리고는 왜 짐승에게 실려서 짐 덩어리가 된다는 말인가? 이것의 우상의 실체인 것을 모르는가? “야곱의 집이여”하시며 하나님께서 톤을 바꾸신다. 왜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라 하시나? 누구를 지칭하시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자들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안기었고 하나님께 업힌 자들? 어미와 자식처럼 끊을래야 끊어 버릴 수 없는 찰떡같은 인연(?)이라 하시는 것인가? 어쩌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에 그토록 연연하고 계신 것 일까?
그뿐 아니라 “내가”, “내가”,“내가”,“내가”,“내가”를 반복하시면서 늙어 백발이 되어도 “남은 자들”을 품으시겠다고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신다. 아니 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까지 하시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업어 주시고 품어 주시고 구하여 내리라며 변함없는 연민을 보이시는 것인가? 철저히 신의를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니...“남은 모든 자들”이여 복 받은 자여라! 다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언급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누구와 비교한다는 말인가? 누구랑 같다는 말인가? 우상 조각들과 비교하다니? 금이니 은으로 신이라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경배해? 신이라는 우상들이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람의 어깨에 메어 처소에 옮겨 놓아야 하는 것들인데? 사람이 옮겨 주어야 하고 대답은커녕 소리도 못내고 고난에서 구해 내지도 못하는 것들을 신이라고? 그야말로 웃기는 짬뽕 아닌가?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라 점잖케 이스라엘을 타이르시며 옛적 일을 기억하라 한마디 하신다. 옛적 일? 무엇을?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후 줄곧 야곱의 집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을 보라하시는 것이 아닌가? 동쪽에서 부르실 사나운 짐승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레스를 부르신다는 것인가? “반드시”에 담긴 하나님의 결단이 돋보인다 할까? 마음이 완악해지고 하나님의 공의에서 멀어진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치시고 구원하실 거라 하나님의 구원의 카드를 꺼내 보이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14:7) 그런데 왜 구원을 시온에서 베푼다 하시나? 영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 영생의 축복을 허락하신 시온?
어찌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품으실 수 있었을까? 이스라엘은 어찌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일까? 하나님의 얼굴을 초점하지 않고 자기중심에 빠진 것이 원인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에서 금이 가게 한 것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 결단하신 하나님을 만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찌 나를 구원하시려 작정하신 것일까? 나의 의가 아니요 예수 십자가의 피로 내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신 하나님을 나는 나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있는가? 내가 자기중심의 미묘한 덫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하고 말씀 속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날마다 배워야 하고 이스라엘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 내게 하시는 말씀인 것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셔야 하는 인생이 아닌가? 성령 하나님, 내가 영적 시온에 서 있도록 나를 불철주야로 관리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