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7:14-25 (9/19/2024)
왜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다 할까?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내기를 거절하는 완강함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명령하시나? 왜 바로가 아침에 나일강으로 나오나? 나일강에 나왔다가 갈대 상자에 있는 모세를 만난 공주가 생각난다. 그런 우연 아니 필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나일강으로 나가라 하신다. 왜 이때 이스라엘 자손이라 아니하시고 “히브리 사람의 여호와”라 하시나?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했는데 그 명령을 듣지 않았음을 바로에게 깨우치라 하시는 것인가?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것을 똑똑히 보여 주시려는 것이 아닌가? 바로 겁 좀 먹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니 마이동풍. 하나님께서 단단히 작심하셨다 할까? 하나님의 지팡이가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할 것이고 그때에야 바로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될까? 나일강의 모든 생물은 죽어 악취가 나서 애굽인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될 것을 전하라 하신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론이 “그” 지팡이를 애굽의 모든 물 근원들에 내밀어 피가 되면 식수까지 피로 변할 것이라니. 그 시대의 바로, 단지 인간일 뿐인 그는 전능자이신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이런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한 것뿐일까? 그런데 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애굽의 마술사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 바로는 눈 하나 끔쩍 않고 궁으로 돌아가고 애굽인들은 마실 물을 구하느라 땅을 파헤치며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바로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 해결을 위한 마음 씀씀이가 없는 악한 왕이라는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왜 바로의 마음은 계속 완강한가? 완강(stubborn)이란 무엇인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 자기 고집만 피우는 것? 자기 속으로 함몰하는 것? 결국 절대자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떤가? 나는 완강하지 않은가? 완강하지 않아 보이면서도 완강한 나는 아닌가? 나는 어찌하면 완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갈2:20) 나를 일깨우는 바울 오빠의 목소리가 나를 찌른다 할까? 내가 여전히 복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뿔사! 그러나 나의 수준을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말씀 속에서 나의 tutor되시니 절망 가운데 내게 소망이 있음에 감사해야 않은가? 나의 죄성과 연약함이 없어 나를 하나님의 딸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일단 나 대신 예수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예수의 피로 나를 덮으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나는 어떤 수준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바로의 완강함을 통해 나는 나를 만난다. 그리고 시편 136으로 하나님의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를 대면한다. 나의 완강함 퇴치가 하나님께 감사가 아닌가? 결국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라 할까? 나는 모든 것, 그것이 어떤 상황이나 형태이든 감사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사실 앞에 무릎을 끓는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내가 감히 하늘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니? 그뿐인가? 내게 하나님의 심정이 담긴 말씀을 주시다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오직 감사! 감사! 감사!
바로와 신하들과 그의 백성은 여호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지금 하나님을 알면서도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하물며 그들이랴!! 그러나 그 이적들을 보면서도 백성들을 내 보내지 못하는 현실적이고 물절적인 손해로....차일피일 미루고 미루고 그러다 완전 큰 코 닥친 것이지....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항상 감사해야죠, 집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