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3:1-6 (8/9/2024)
바울이 어떤 “같은 말”을 썼던가? 왜 같은 말 쓰는 것이 수고도 없고 안전하다 하는가? 왜 삼가고, 삼가고, 삼가라 하나? 누구를 삼가라는 것인가? 왜 개들, 행악자, 몸을 상하는 사람들을 삼가라 하나? 바울은 할례의 정의를 무엇이라 하나? “그러나”로 무엇을 드러내나? 왜 바울 자신도 육체를 신뢰하는 자라 토로하는가? 왜 자신이 육체를 신뢰하던 자라는 것을 절절히 드러내고 있나? 이번에는 “그러나”로 바울은 무엇을 고백하는가? 바울은 무엇을 해로 여기나? 왜 해로 여기나? 왜 바울이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것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 할까? 무엇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인가? 바울은 무엇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가? 예수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왜 바울의 의가 율법으로 얻게 된 것이 아닌 것을 언급하나? 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라는 것을 명시하는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내포하는 내용은 무엇이라 할까? “예수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알려고 왜 바울이 예수의 죽으심을 본 받고 싶다 할까? ”죽은 자 가운데 부활에 이르려“는 무엇을 뜻하나? 바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무엇인가? 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나?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왜 그것을 잡으려 하나? 어떤 “푯대”인가? 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 계속 언급할까? 바울이 언급한 “부르심의 상”은 무엇인가? 무엇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인가? 어떤 일은 무슨 일인가? 달리 생각한다 하나? “어디까지 이르렀든지”란 무슨 뜻인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나는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다. 달음박질 하는 것을 내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매일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하여 달려가는가? 나는 바울처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나의 달음박질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지 않은가? 고난을 나의 가장 큰 방해꾼이라 할까? 세상살이에 고난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니 나의 고난도 하나님의 지배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게 그리고 하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닌가? 역설적인 것 같지만 진정한 하늘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은 아닐까? 곧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알도록 하시려는 배려일까? 고난이 넘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일까? 하늘의 영원한 기업,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라 하시는 것인가? 내 책꽂이에 Bruce Wilkinson의 책 ”A Life God REWARDS"가 웬일인지 눈에 띈다. “Why Everything You Do Today Matters Forever"라는 소제목에 번쩍 정신이 들어 다시 읽기 시작한다. 나는 내가 받을 상을 쌓아갈 생각을 하기는 했던 것인가? 나는 Wilkinson이 말씀으로 풀어 주고 정리한 상에 대한 개념을 살아 내고 싶어 차근차근 꼽씹는다. 나는 하늘의 상을 소망하며 신앙의 경주를 달려가리라! 성령 하나님 도와주소서!